[W.STORY] 갈바닉 브라이드 #2 (기획의 완성과 팀의 결성-프리프로덕션)

2023-04-17



어떤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가?


학생 개발자들끼리 모이면, 항상 나오는 화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내용이죠. 열정 가득한 대학생 개발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는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 이런 게임을 출시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다며 자신의 꿈을 나누곤 했죠.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끼는 것이 항상 어려웠습니다. 말주변이 없었던 것도, 열정이 없었던 것도 아닌, 바로 ‘만들고 싶은 나만의 게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발자로서 언젠가 만들고 싶은 자신만의 게임’. 해외의 인디게임 데브로그(Development + Vlog)들을 시청하다 보면, 이러한 소망을 지칭하는 간단한 표현 하나가 자주 등장합니다. 바로 ‘Dream Game’이죠.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Dream Game’에 대한 데브로그 영상들



저는 ‘Dream Game’이 없는 개발자였습니다. 만들고 싶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죠. 어릴 적부터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쓰며 여러 아이디어들을 싹 틔워 왔고,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자체는 존재했습니다. 그저, ‘꿈’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절실하고 애착이 가지 않을 뿐이었죠.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만들면 좋지만 안 만들어도 그만인, 그저 브레인스토밍의 편린들일 뿐이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가슴이 시키는 프로젝트를 해야 오랜 기간 열정을 불태우며 흥미를 유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출시를 위해 달리는 만큼 이성적인 선택들이 동반되어야 했죠. 동시에 꿈이었기 때문에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낸 것이 내 꿈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WCS 2014에서 우승한 박세준님의 트레이드마크, 파치리스. 최애라서 선택한 것이 아닌,

철저한 분석과 노력 끝에 선택하여 우승을 거머쥐었기 때문에 최애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로그라이크 장르는 어떨까요? 로그라이크는 분명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현재 트렌드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던그리드>, <스컬>을 비롯한 등 다양한 로그류 게임을 즐겨 플레이했고, 심지어 로그라이트 게임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그류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개발자는 당연히 저 혼자만이 아닐 게 분명했죠. 실제로 지금도 수많은 로그라이크 게임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시작 후 탐방할 기회가 있었던 2022 플레이엑스포 또한 이 사실을 증명해주었죠. 전시회 탐방을 마친 기획자 알레아는 이를 두고, ‘로그라이크의 홍수’라고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게이머들은 이제 <슬레이 더 스파이어>와 같은, 최소 수십 시간은 즐길 수 있는 명작 게임을 비싸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만든 게임이 성공하기 위해서 경쟁해야 할 게임들이, 이 과포화된 장르에서는 그 질도 양도 너무 강력했습니다.


장르 선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던 2022 플레이엑스포



따라서, 내가 가장 잘 알고 개발할 수 있는 장르, 상대적으로 시장의 경쟁이 수월하면서 지지 기반을 형성할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일까? 라는 접근법으로 만들 게임을 떠올려내 보기로 했습니다.


FPS는 어떨까요? <보더랜드 3>와 <타이탄폴2> 모두 알레아와 함께 즐겼습니다. 다만 FPS 장르 자체에 대한 경험 자체가 많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3D 아트 리소스를 구하는 것에 벽이 느껴졌습니다. 게임 개발을 시작한 이래, 3D 아트를 다루는 대학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생존 게임은? <굶지마>와 <디스 워 오브 마인>을 필두로, 제가 가장 선호하며 다양한 플레이 경험을 지닌 장르가 바로 생존이었습니다. 하지만 기획안 작성 결과, 수많은 재화들 간의 밸런스 조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직 생존 게임을 만들기 위한 시간과 자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어째서 크라우드펀딩이나 얼리엑세스의 수혜를 받은 생존 게임들이 다수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죠.


다른 괜찮은 장르가 없을까 헤매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잠입 액션 게임이었습니다. <디스아너드>나 <모나코>처럼, 적들을 피해 돌아다니며 뒤를 치는 게임들 말이죠.


추가적인 조사 결과, 스텔스 장르는 스팀 상점 페이지 카테고리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마이너 장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태그’로 분류를 해 보아도, ‘잠입’ 태그의 게임은 2000개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장르의 활성화가 진행된 것은 잠입 액션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출시작 수가 로그라이크에 밀리는 것마저 확인할 수 있었죠.


그간 스텔스 시장은 다수의 대형 프렌차이즈들에 의해 견인되어 왔습니다. <스플린터 셀>, <메탈 기어>, <시프>, <어쌔신 크리드>, <히트맨>, <디스아너드> 등 시장의 규모에 비해 스텔스 게임들의 IP는 정말 강력합니다. 이런 IP들을 필두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여러 프랜차이즈들이 정체성을 잃거나 명맥이 끊기며 스텔스 장르는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시프>는 3편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후속작 소식이 없고, <디스아너드>는 3편으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졌습니다. 톰 클랜시 선생님의 타계 후 <스플린터 셀>도 주춤했고, <메탈 기어> 또한 디렉터 코지마 히데오가 회사를 떠나며 사실상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가 점점 어드벤쳐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이제 나밖에 안 남았네…”
‘메탈 기어’의 주인공 스네이크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하는 ‘스플린터 셀’의 주인공 샘 피셔. – 고스트 리콘 와일드랜드

 


그런데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스텔스 태그가 붙은 게임들의 출시와 판매량 자체는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아래 이미지를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스팀 스텔스 태그 게임 TOP 20



스팀DB 기준, 스텔스 태그 게임 상위100에 위치한 게임들 중 ‘잠입 액션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은 많이 쳐도 반절입니다. 그중 10개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고요. 상위에 랭크된 대부분의 게임들은 규모가 크며 대중적인 인기를 끈 오픈월드나 FPS 혹은 어드벤쳐 게임이거나, 게임성 자체가 스텔스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 호러나 전략 게임들입니다. 이 게임들은 스텔스 게임이라고 자신을 광고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적을 피해 숨거나 암살 기능이 있는 등 스텔스 요소가 들어있죠.


스텔스 요소를 지닌 게임들의 증가와 그 실적은 스텔스 장르가 마니악함을 완화할 수 있는 적절한 요소와 조합되면 대중적인 재미를 끌 수 있음을,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던 잠입 액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중들에게 녹아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장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IP, 10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포켓몬 시리즈의 최신작조차도 스텔스 게임이었으니까요.


여러 논란은 있었지만, 포켓몬 덕후이자 스텔스 팬인 저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게임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지금이 스텔스 게임 개발 적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시장에서 경쟁력을 지닐 수 있으며 스텔스 게이머도 일반적인 게이머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코어 메카닉을 지닌 잠입 액션 게임’을 핵심 기획 의도로 설정하게 된 배경이었죠. 여기에 스텔스 요소가 들어있는 대중적인 게임을 접하며 스텔스에 익숙해진 게이머들이 스텔스 장르에 적극적으로 유입될 수 있게끔, ‘가혹하지 않은 스텔스 게임’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서의 완성


스텔스 시스템 자체를 기획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잠입 액션 게임 <메탈 기어>부터 현대 잠입 액션을 정의한 <시프>까지, 스텔스 게임의 메카닉들은 이미 수많은 명작들을 거치며 확립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문제는 [갈바닉 브라이드]의 코어 메카닉, ‘갈바니즘 컨셉의 전기 초능력’으로 대표되는 ‘상호작용 시스템’이었습니다.


[갈바닉 브라이드]의 시스템적 구성 요소들



무엇보다 ‘상호작용 시스템’이 ‘스킬’, ‘속성’, ‘아이템’을 아우르는 대규모 시스템이었다는 점에서, 기획의 난이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전부 연계되는 시스템들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기획서로 분리해서 작성하기 어려웠고, 제가 그동안 애용한 파워포인트로는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가 명확했죠. 결국 정공법으로, 설명해야 할 항목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한 워드 파일에 모든 내용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달할 양이 많았던 만큼, 최대한 줄글을 줄이고 레퍼런스와 도표로 직관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 당시 알레아의 경우 다른 프로젝트의 마무리로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에, 레퍼런스 조사를 분담하고 간간이 작업 상황을 공유하는 정도였죠.


그렇게 3월, 프리프로덕션의 시작으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나 [갈바닉 브라이드]의 시스템 기획서가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공백 제외 8만 자가 넘어가는, 훗날 전공책이라고도 불리게 될 132페이지의 기획서가 말이죠. 작업 시간은 14,602분에 달했습니다. 이는 하루 8시간씩 31일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작업량이었죠.


프로토타입에 필수적인 내용들만 작성했음에도, 엄청난 분량의 기획서가 탄생하였습니다.



사실 ‘100페이지 기획서’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들도 존재합니다. 기획자 취업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면, ‘회사에 지원할 때 100장짜리 기획서를 제출하지 마라’라는 조언도 꽤 자주 들을 수 있죠. 다만 이 문서가 ‘스토리나 세계관에 대한 100장짜리 문서’가 아닌, ‘각 시스템을 어째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서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개발 시작 후 이 시스템 기획서는 프로토타입 초중반부를 견인하였으나, 후반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구현된 것에 더해 유지 보수의 어려움이 발생하며 사용량이 줄어들게 되었죠. 이후 추가되는 다른 시스템들은 전부 별도의 문서를 파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획 발표와 IA게임즈의 결성


이제 기획이 완료되었으니, 함께 게임을 개발할 동료를 구할 차례였죠! 저와 알레아는 무사히 면접을 통과해, 목표로 하던 게임 개발 동아리에 합격했습니다. 물론, 서로가 20년지기 친구라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이거 완전 카르텔이잖아!" 알레아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지나, 자신의 기획안을 어필하고 팀원을 구하는 활동인 ‘기획 발표’가 진행되었습니다. 발표 준비는 완벽했습니다. 디테일한 모집 요강과 제안서부터 프로그래머를 위한 시스템 견적서와 시장 분석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코로나19 휴유증을 겪고 있던 제 목 상태였죠.
결국 발표 리허설을 들은 알레아의 특단의 조치로 말 한 마디가 끝날 때 마다 잠시 마이크를 끄고, 크게 숨을 쉬고, 기침을 하고, 따뜻한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시는 극약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탈진해 늘어져 있던 중,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지원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죠! 무려 발표 종료로부터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개발 기간과 좋아하는 게임에 대한 간단한 문답 후, 결정은 어렵지 않게 내려졌습니다. 팀의 프로그래머, 썬이 합류한 순간이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아티스트인 마린과 프로그래머 옥타까지 구인이 완료되며, 사흘만에 팀원 모집을 완료하고 바로 공식적인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습니다. 첫 회의에서는 IA게임즈라는 이름이 생기며 팀에 열정과 정체성이 더해졌고,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며 개발의 첫 걸음, 프로토타입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IA게임즈의 두 번째 마일스톤, 프로토타입에 해당되는 이야기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 개인의 이야기가 주였다면, 이제부터는 다섯 명의 대학생들이 게임 개발을 하며 겪은 것들과 발전해 나가는 게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다음에 만나요~




스파이키 / 게임 기획자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숨쉬는 생명을!

IA 게임즈(It's Alive Games)는 게임개발 연합동아리 'GameMakers'에서 결성된 5인 구성의 대학생 인디게임 개발팀입니다. 2023년 출시를 목표로 잠입 액션 게임 프로젝트 '모던 프로메테우스'를 개발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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