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를 극대화 하는 상황들 - 게임으로 본 사회심리학 (5)

2020-11-09


시장이 반찬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음식의 종류나 질보다 더 중요한 만족의 원천은 바로 음식을 먹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을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즉 어떤 음식의 재료나 요리사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손님의 만족과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배가 부른 손님에게는 그 아무리 좋은 재료와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더라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게임에서 유저들이 느끼는 재미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동일한 활동도 내가 선택했는가, 시키는 일을 하는가에 따라서 재미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시험기간 직전 주말에 게임을 딱 한 판만 하고 공부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흔한 말로 꿀잼입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렇게 게임을 마치고 공부를 하려는 찰나 갑자기 지저분한 책상과 정리가 되지 않은 공부방이 눈에 거슬립니다. 이것을 정리하고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사실 책상 정리나 방 청소를 하라는 소리는 평소에 가족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나중에 할 거라고 늘 미루어 놓곤 합니다. 그런데 시험 기간에는 늘 미루어놓았던 청소가 갑자기 하고 싶어지지요. 



이것 역시 상황 변화가 만들어낸 심리적 효과입니다. 평소에 청소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시험 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시험공부에서 벗어나 내가 기꺼이 선택하는 즐거운 활동으로 탈바꿈합니다. 게임을 좋아하기도 할 뿐 아니라 잘해서 아마추어 고수였던 사람이 프로게이머가 되면 게임에 대한 재미가 대폭 감소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게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증가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내가 선택한 놀이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만 하는 의무로 성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라이언과 디시의 ‘자기결정성이론(Self Determination Theory)’ 중 ‘자율성(Autonomy)’ 요소가 작동한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이론이 맞다면, 평생 게임을 즐기려면 프로게이머는 피해야 할 직업이란 생각이 듭니다. 의무적인 일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취미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여겨집니다. 


[출처 : https://www.charliehr.com/blog/improving-autonomy-at-work/]


자기결정성이론의 다른 요소로는 ‘유능성(competence)’과 ‘관계성(relatedness)’이 있습니다. 먼저 유능성을 살펴보면, 내가 고른 게임이지만 해도 별로 실력이 늘지 않으면 만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건 나하고 맞지 않는 게임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유능성은 내 안에서 실력이나 능력이 증가되는 경험이 재미를 유발하게 된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내가 점점 더 유능해진다는 의미는 나의 능력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강함을 증명하는 것은 강하다는 상대를 만나서 이기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늘 이기는 쉬운 게임은 재미가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이겨도 유능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퀘스트나 몬스터는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좌절과 상처를 주려고 만들었다던 ‘Getting over it(일명 항아리 게임)’이 인기를 끌었던 것이나, 100명의 플레이어 중 1명 혹은 1팀만 치킨을 차지하는 ‘PUBG(일명 배틀그라운드)’의 인기 요인은 좌절과 상처를 극복하는 것 자체가 재미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잘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 요소는 ‘관계성’입니다. 내가 선택한 게임에서 내 실력이 쭉쭉 늘어나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재미를 충분히 느끼기에는 2% 부족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지켜봐 주고, 인정해주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재미를 극대화시켜주는 숨겨진 요소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관계성은 재미의 사회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에서 오는 흥분은 아마도 관계성의 재미 중 백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네트워크가 되지 않던 콘솔 게임 중심의 초기 게임 시장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될 수 있던 요인 중 하나가 네트워크 기반의 MMORPG 게임으로 주류가 이동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관계성이 게임의 재미를 한 단계 더 증폭시킨 결과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함께 즐긴다는 것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능력자 고렙 유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일명 버스타기의 경험을 주고 받는 것이지요. 


장판 잘 피하고, 힐딜 잘 넣고, 어그로 잘 끌기만 하면 승리


이런 방식으로 저레벨 유저나 고레벨 유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상황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게임 시장규모뿐 아니라 시장에서 게임의 인기를 누리는 기간도 몰라보게 길어졌습니다. 과거 6개월에서 길어야 1~2년이었던 게임 사이클이 10년을 넘어가는 장수 게임들이 등장한 것은 게임 자체의 재미뿐 아니라 게임을 둘러싼 게이머들의 관계성이 만들어 낸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재미를 극대화하는 상황은 더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시간의 압박도 재미를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똑같은 게임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재미를 경험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딱히 할 것이 없는 휴일 오후에 즐기는 게임과 시험 기간 직전 주말에 즐기는 게임은 비교불가입니다. 비슷하게 5전 3선승제의 게임에서 첫 번째 게임과 마지막 5번째 게임은 긴장감의 정도나 승패의 쾌감 혹은 좌절감의 정도가 달라지지요.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시간의 양이지만 심리적으로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는 그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치알디니 (Robert B. Cialdini)는 이런 현상을 ‘희소성의 원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기간이 충분하더라도 꼭 마감시간이 되어서 급하게 일을 하는 습관은 시간의 압박을 느끼면 아슬아슬한 재미를 느끼려는 무의식적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는 우리가 여유롭고 풍족할 때 충분히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심리학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무적인 일로 압박감이 몰려올 때, 어렵고 좌절스러운 경험을 뚫었을 때, 또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때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하고 초조할 때도 재미를 위한 중요한 조미료가 되지요. 이런 점에서 재미는 재미를 추구해서는 얻을 수 없고, 열심히 살면서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보상 중 가장 손쉽고도 강력한 것이 게임이란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장주 소장 /

평범한 사람들이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게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문화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 : 청소년에게 게임을 허하라(공저), 사회심리학(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