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게임(Serious Game)은 대중미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 아트 게이밍을 향한 기술적 지평들 (3)

2020-12-22


게임이라는 단어에 직조되어 있는 사회적 기의 때문에 그것을 조작하고 탐색하는 플레이는 종종 매우 가벼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게임을 한다’ 라고 발화했을 때, 게임을 하는 행위는 ‘나는 진지한 사고를 하지 않는다’ 라는 사회적 언표를 투과하며 협소한 의미들로 침잠하게 된다. “게임을 하는 A씨” 라는 말을 듣자마자 우리가 응당 떠올리는 것은 덥수룩한 수염에 지저분한 속옷 차림의 남성 A씨가 빈 컵라면 용기가 잔뜩 널브러진 책상 위에서 구부정하게 마우스 클릭을 하고 있는 광경이다. 게임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기시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 푸코가 말한 것처럼 언표란 발화 행위나 진술, 명명이나 언명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지층, 즉 담론의 차원에서 언어를 배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A씨나 책을 읽는 A씨가 게임을 하는 A씨보다 더 유익하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와 책을 읽는 행위가 어떤 진지함을 요구하거나 그 진지함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 즉 지식 생산에 있어 영화와 책의 독해에 투영되어 있는 ‘힘들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소주병이 널브러진 방바닥에 앉아서 폐인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탐독하는 A씨나, 평일 낯 독립영화 상영관에서 하루 종일 고다르의 영화를 보고 있는 A씨는 상상하기 어렵거니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불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일요일 낯 우아한 양장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조이패드로 게임을 조작하면서 와인과 치즈를 음미하는 A씨는 언어도단 그 자체이다. 이러한 상상적 예제들은 ‘게임이라는 문화가 사회적으로 하대받고 있다’ 라는 일차원적 힘의 상태를 지적하고자 제시된 것들이 아니다. 언표와 지식을 이루는 시대적 지층은 단순한 권력의 역학으로 축적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담론적 권력은 지배적인 힘 뿐 아니라 피지배자의 반작용을 통해서도 관계망을 형성한다.

텍스트란 한 사회의 힘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지고, 그를 둘러싼 다양한 언표들이 서로를 향해 흐르고 밀려나다 걸러진 입자들이 퇴적되는 장소, 즉 담론의 삼각주라 할 수 있다. 또한 텍스트는 의미들이 힘들의 관계망 속에서 첨예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는 격전지이다. 계급-성별-지역-인종-세대로 대표되는, 지배/피지배의 언어들이 서로의 가시성을 드러내기 위해 수사와 내러티브,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고지전을 벌이는 장소이며, 다스리는 자의 감언이설과 해방되고자 하는 자의 군가가 협상하는 외교 테이블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과 영화 등의 올드미디어는 이러한 프로세스로 가득 찬 근대라는 시간 속 하나의 ‘대항 이데올로기’를 표현할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인류사에서 출판된 활자 인쇄물의 90%는 포르노였고, 남은 10%의 90%는 일시적인 기분 전환을 위한 흥밋거리이거나 소비 사회의 상품·정치 선전물이었지만 우리는 <레 미제라블>과 <죄와 벌>을 역사의 정수로 여기고 있다. 인간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성찰, 촘촘하게 펼쳐진 억압의 그물망을 찢고 새로운 하늘을 열기 위한 언어적 기획들을 통해 문학과 영화는 한 시대의 교양의 준거로서 등재될 수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시대정신’ 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과 영화는 무엇보다 서브컬처와 문화산업의 문을 열어젖혔다. SF, 판타지, 추리, 공포 등의 장르뿐만 아니라 이와 결부되어 있는 다양한 소비 양태, 문법, 그리고 유흥이라는 삶의 지평들을 재개발한 것이다. 근대와 소비사회라는 긴 터널 빠져나온 후에 탄생한 게임은 주로 서브컬처와 장르의 문법을 답습했다. 이런 흐름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뉴미디어는 최초에 올드미디어의 마지막 문법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진은 르네상스 회화를 흉내 낸 ‘픽토리얼리즘(그림처럼 보이는 사진의 기법)’이란 과도기를 거쳤고, 영화는 연극을 모방하며 긴 시간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뉴미디어는 결국 독자적인 텍스트 재현 방식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사진이 르포르타주를, 영화가 몽타주를 발견하고 난 후에는 서브컬처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사회의 언표 체계와 대자적으로 교섭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다. 요컨대 한 미디어가 담론의 지층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언술하고 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순히 ‘삶에 대한 진지함’이라는 테마를 갖고 있느냐 아니냐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진지함’이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표상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기를 표현하는 뉴미디어의 재현 양식들. 사진을 회화와 동등한 예술로 취급받길 원했던 사진가 로베르 드마시(Robert Demachy)는 비은염 인화법(은이 아닌 고무에 사진을 인화하는 기법)을 통해 사진의 특성을 지우고 유화처럼 보이는 효과를 부여하고자 했다. 한편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들은 연극의 미장센 기법을 영화에 도입하고자 했고, 비네의 유명한 공포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우)에서 제시된 세트 표현 방식은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영화제작 시스템에서 차용하게 되었다.


그간 게임은 그 본질이 ‘플레이’에 있기 때문에 진지함을 탐색할 수 없으며, 대문자적인 담론의 질서에 참여할 수 없는 미디어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는 플레이가 진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카드놀이를 하다가 서로의 멱살을 잡는 정도가 ‘플레이의 진지함’이라고 상상하기가 부지기수다. 이는 <호모 루덴스>에서 ‘플레이’가 문화나 예술이 아니라 문화 이전의 삶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한 하위징아(Huizinga)의 설명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러나 ‘재미 추구’라는 단순한 범주에서 생각해 보면, 결국 문학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안나 카레니나> 나 <율리시즈>를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읽는 독자는 아무도 없으며, <400번의 구타>를 보면서 입속의 팝콘을 웃음과 함께 토해내는 관객도 없다. 결국 단순 재미를 넘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적 판단의 문제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게임의 본질이 재미 추구라고 해서 ‘진지한 게임’ 이 반드시 재미를 줘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즐겁고 재미있는 게임이 진지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히치콕의 영화가 주는 서스펜스나 봉준호의 영화가 선사하는 블랙유머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재미가 아닌 비판적 시사점을 추구하는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의 예제들. <디스 워 오브 마인>(2014)은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졌던 코소보 전쟁을 모티프로 하여, 전쟁의 참상 속에서 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르포르타주 플레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탠리 패러블>(2013)은 <하프라이프 2>의 소스엔진을 개량해 만든 모드 게임으로, 게이밍의 매체적 본질인 ‘선택과 결과’의 에르고딕을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지적 유희를 선사한다. <페이퍼, 플리즈>(2013)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공산주의 국가의 출입국 심사관이 되어 노동과 플레이의 경계를 흐리는 경험을 강제하며, <레플리카>(2016)는 경찰국가의 감시와 억압에 관한 게임적 기능을 매체화한 플레이를 선보인다.


진지한 게임(serious game)이란 개념은 본격적으로 탐색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플레이라는 형식 하에서 진지함과 재미의 동시 추구는 분명 어려운 문제다. 이 분야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몇몇 게임들이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다. <디스 워 오브 마인>, <스탠리 패러블>, <페이퍼, 플리즈> 같은 독립 게임 개발 영역에서 획기적인 플레이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면, 거대 자본의 영역에서도 <스펙옵스: 더 라인> 이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과 같이 장르적 스펙터클을 전유한 예도 있다. 이런 게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올드미디어 텍스트들처럼 상업성/예술성이라는 지형이 형성되기 시작한 징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인 걸작들이 출현했다고 해서 반드시 담론의 층위에서 대항적인 언표를 생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들을 독해하고 사회적 의미들로 등재시키는 해석적 동력인데, 이런 점에서 ‘진지한 게임’ 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미궁으로 던져져 있다. 게임이라는 텍스트를 체계적으로(사회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읽어나가는 문해력이 부재한 것은 엄밀한 비평장이 제대로 설립되어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텍스트를 건축하는 방식에 대한 사회문화적 공통감각이 부재해서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진지한 게임을 문해하는 약속된 방법 자체가 보이지 않으며, 서방에서는 이러한 저변이 비교적 빠르게 형성되는 중에 있지만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다. <배틀필드 5> 와 <라스트 오브 어스>를 둘러싼 이용자와 제작자의 갈등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이 확장되고 있는 진지한 게임의 지평에도 불구하고 담론의 층위에서 ‘대항적 의미들을 생성하는 게임의 문법’을 발굴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도 엿보이지 않는다. 진지함과 재미 사이, 대항 이데올로기적 재현양식과 장르의 재현양식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아직 허공에 던져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자의 가증스러운 PC(politically correctness)함을 야단치거나 이용자의 무지몽매함을 탓하는 이분법적 잣대는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은 이제 말초적인 재미 추구의 영역으로만 있을 수도 없으며 한편으로는 경향소설처럼 사회적 정의나 이념 추구의 도구로만 전유될 수도 없다. 오히려 더욱 경계해야 하는 현상은 UBI소프트나 EA등 거대 다국적 자본에 의한 천편일률적인 게임의 대량생산 구조이다. 게임의 테일러리즘 혹은 포드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규격화된 이들 제작 시스템은 비판적으로 사회를 탐구하는, 게임만의 독자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통째로 집어삼킬 위험을 야기한다. 한편 스팀과 같은 거대 유통 플랫폼은 독립 개발자들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해주긴 했지만, 이 채널은 거꾸로 이들이 손쉽게 업계 인력으로 편입되고 독창적인 땜장이질을 또 하나의 주변화된 산업문법으로 머무르게 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 되고 있다.

‘비판적 게임(critical game)’ 이나 ‘진지한 게임’이라는 어색한 명명에서 벗어나 게임 자체가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진지하고 비판적인 관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올드미디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시행착오로부터 사회 전체가 획득하는 공통 감각의 토대 위에 새로운 게임 미학이 잉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은 거대 자본과 고도 기술 집약적인 노동이 투여되어야만 적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분야이며, 산업적으로 규격화된 기술을 차용해야만 하는 한계들을 지니고 있다. 게임이라는 미디어 자체가 일종의 도그마인 셈이다. 요즘은 언리얼과 유니티에서 벗어난 게임들을 상상하기 어려우며, 오픈 소스 운영체제인 리눅스나 오픈 하드웨어 기반(라즈베리 파이)의 비디오 게임기를 접하기는 더욱 어렵다. 최초의 게임 개발자들이 오실로스코프와 PDP-1 국방 컴퓨터를 역설계해서 게임을 제작했던 자유로움은 어떻게 보면 산업적 현실 속에서 더욱 축소되고 있다.


오픈 하드웨어 DIY 게이밍의 예제들. Creoqode 2048(좌)는 확장과 개조가 가능한 오픈소스 하드웨어 콘솔을 제공하고, 이용자가 손수 프로그램한 코드와 커스텀 디바이스를 연결해 주게끔 하는 개방형 게이밍 플랫폼이다. MAKERbuino(우) 역시 8비트의 자가 프로그램 가능한 아두이노 게이밍 컨트롤러로, ‘게임의 코드를 직접 조작하고 만드는 과정’ 자체를 게임화하는 독특한 장난감이다. 이용자가 스스로의 감각과 손의 느낌으로 플레이를 설계하는 기술놀이의 지평들이 확대되는 데서 아트 게이밍을 향한 사회적 도전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게임 제작 환경에서 오픈소스 게이밍은 그 기술적 저변도, 인식도 일천한 상황이다.


게임이 산업이 아니라 ‘대중 미학’으로 등재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게이밍의 언어와 기술에 대한 다각화된 시도와 ‘창조적 시행착오’들이다. 뉴미디어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사회적 사용을 통해 그 문화적 언어의 내용들을 획득하는 역사를 지나 왔다. 진지한 게임은 재미를 담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결국 “사회적 담론의 질서에 참여하는 게이밍을 위해 어떤 기술과 재현 양식을 실험해야 하는가?” 라는 구체적인 과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아 글쎄, 이런 게임도 있고 이제 게임은 애들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라며 무작정 땡깡을 부리거나 ‘게임산업의 매출액이 15조 원을 넘어갔는데 게임은 이제 문화가 아닌가요?’라며 경제주의적 잣대로 우기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진지하게 게임의 형식과 내용을 탐구하는 비평적 저변의 확대나 관련 정책 입안은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전체 수준에서 산업규격 바깥의 기술들을 실험하는 게이밍의 ‘미학적 시행착오’들이 필요하며, 이것들을 통해서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게임이라는 뉴미디어의 본질과 그 플레이가 자아내는 질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현우 디지털 문화연구 /

정보·기술 문화연구자로, 테크노 게이밍 문화와 디지털 환경에서의 노동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사물에 수작부리기』(공저) 등이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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