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TORY] 트롤리 문제와 라스트 오브 어스 - 게임잡학사전

2022-01-17

※게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선로 옆에 서 있다. 제어장치가 고장 난 기차 한 대가 선로를 따라 달려온다. 선로 끝에는 5명의 사람이 묶여있다. 잠시 후면 기차가 5명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다. 마침 당신 옆에는 스위치가 있다. 스위치를 작동시키면 기차가 선로를 바꾸어 선로 끝에 묶인 5명은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다른 선로의 끝에도 1명의 사람이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기차가 5명을 덮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과 1명을 희생 시켜 5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rolley_problem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라고 불리는 위 사례는 1967년 필리파 풋(Philippa Foot)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덕분에 유명해졌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요약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1명을 희생시키더라도 5명의 생명을 살리는 편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다. 실제로 위 질문을 받았던 사람 중 89%도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그럼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만약 다른 선로 끝에 묶여있는 한 사람이 당신의 친구나 가족이라도 당신은 같은 선택을 내리겠는가?

 

2013년 출시된 너티독(Naughty Dog)의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는 변형된 트롤리 문제에 대한 세련된 대답이다. 게임의 시대적 배경은 서기 2033년. 20년 전부터 시작된 동충하초 변종의 공격으로 인류는 종말의 위기에 놓여있다. 좀비처럼 변한 감염자들은 사람들을 공격해 또 다른 감염자로 만들었고, 감염자의 수는 끝도 없이 늘어만 갔다. WHO가 백신 개발에 실패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격리구역을 만들어 생존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몇 가지 그룹으로 갈라졌다. 일부는 군인들의 통제를 받으며 격리구역 안에 머무는 편을 택했고, 파이어플라이(firefly)라는 이름의 저항조직은 군인들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격리구역에서 밀수를 하며 살아가던 주인공 조엘은 파트너인 테스로부터 엘리라는 소녀를 파이어플라이에게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감염자에게 물리고도 좀비로 변하지 않은 엘리의 면역력은 백신을 개발할 중요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조엘과 엘리는 감염자와 군인, 약탈자의 공격을 피해가며 가까스로 파이어플라이가 백신을 개발하는 병원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엘은 파이어플라이가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엘리의 뇌를 들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파이어플라이를 처치하고 엘리와 함께 달아난다.

 


조엘은 마취로 의식을 잃은 엘리를 안고 병원을 빠져나오다가 파이어플라이의 리더인 마를렌과 마주친다. 마를렌은 아직 옳은 일을 할 기회가 남았다며 다시 한번 조엘을 설득하지만, 추적을 염려한 조엘은 마를렌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신기한 건 조엘이 되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박탈하고 파이어플라이 요원들을 하나씩 처치하면서도 별다른 후회나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합리적인 마를렌의 마지막 설득도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인류의 미래야 어찌 되건 엘리를 살려야겠다는 집념만이 플레이어를 지배한다.

 

너티독은 플레이어가 조엘의 이런 선택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게임을 정교하게 설계했다. 조엘은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무기만을 가지고 적들을 상대해야 하고 탄약은 항상 모자란다. 엘리는 수영도 못하고 전투에도 미숙한 소녀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엘리를 보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착과 연민의 감정이 솟아난다. 더욱이 조엘은 하나뿐인 딸을 잃은 아픈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너티독은 탁월한 스토리와 감각적인 연출로 플레이어와 엘리 사이의 공고한 유대를 만들어내고, 인류 전체의 미래보다 한 소녀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그들의 주장에 플레이어가 기꺼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보다 훌륭한 윤리학 교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게임은 예술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이 왜 예술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해보라고.





이병찬 변호사 /


실력은 엉망이지만 오랫동안 게임을 사랑해 온 변호사입니다. 비디오 게임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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