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매체가 무협물을 이어받다, 대전격투게임 (2)

2020-09-28


동아시아의 인기 대중문화 무협물, 새 매체에 올라타다


정의로움과 의리로 다져진 주인공, 강호를 위협하는 사악한 악당 무리들, 숨겨진 음모와 무림을 뒤흔드는 강력한 무공비급의 존재… 무협의 세계는 소설부터 영화까지 현대 한국 대중매체에서 쉽게 빼놓기 어려운 개념으로 자리해 왔다. 대본소 시절에 쏟아진 과도한 양산형 무협의 여파로 무협물을 싸구려 취급하는 시선도 여전히 적지 않지만, 단순 명쾌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풍성하게 담아내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은 이 장르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음을 증명해 오기도 했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무협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다 보니 디지털게임 영역에서도 무협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게임들이 적지 않다. ‘블레이드 앤 소울’이나 ‘천애명월도’ 같은 MMORPG류 게임에서 무협 세계관은 서양식 판타지 세계관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새로운 세상의 베이스로 자리매김하며 독특한 게임의 배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게이머들도 세계관에 대한 기본 이해가 높은 편이라 상당히 많은 양산형 온라인게임들도 무협의 세계관을 차용함으로써 손쉬운 접근을 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무협의 세계관을 가져온 게임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무협이라는 장르를 특징짓는 무술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협물이 가진 개념을 좀 더 현대 매체의 특성으로 살려낸 장르가 나름 무협의 계보를 잇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대전격투 게임이다.


무림 그 자체의 특성을 반영한 대전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통해 본격적으로 오락실 시절 게임의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한 대전격투 게임의 현장은 무림 그 자체였다. 수많은 ‘협객’들이 저마다 동전 하나씩을 품고 구름처럼 게임기 앞으로 몰려들던 시대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대전격투 게임이라는 풍운은 강호의 예를 따랐다. 각자 동전 하나씩을 넣고 벌이는 1:1 승부는 3판 2선승제로 진행되었고, 승자는 계속 게임을 이어 하고 패자는 자리를 떠야 하는 룰로 펼쳐졌다. 아무나 마구잡이로 대전을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와 차례를 지켜 동전을 기계 옆에 깔아 두어야 했으며, 자기 차례가 와야 자리에 앉아 동전을 넣을 수 있었다.


강호의 예를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진’ 사례도 수도 없이 속출했다. 연패를 겪은 플레이어가 상대를 향해 욕설을 퍼붓거나 이른바 ‘실전 현피’를 떴던 사례는 지금도 오락실 시절의 수많은 후일담으로 거론된다. 정파와 사파 논쟁도 벌어지곤 했는데, 이른바 ‘얍삽이’로 불리는 몇몇 연계기나 일부 캐릭터를 대전에 쓰는 것이 합당하느냐 아니냐의 논쟁이었다. 실제로 버그성 기술들이 존재했던 ‘스트리트 파이터 2’의 가일 같은 경우에는 여러모로 말이 많았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무협 장르의 재미 중 협객들의 결투라는 요소는 대전격투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 당사자의 이야기로 거듭났다. 다양한 특수기와 필살기로 구성되는 초식들은 무협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훈련과 연마를 거쳐야 비로소 플레이어의 손에서 자유자재로 구사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수많은 대전을 통해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는 고수라는 길을 향하는 우상향의 실력 그래프를 그려내며 성장의 재미를 만들어냈다. 동네마다 오락실마다 단골 게이머들 사이에서 실력의 서열이 나타났고, 이 지역의 고수 혹은 지존은 누구다라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AI가 아닌 사람을 상대로 하는 대결이 메인 콘텐츠인 대전격투 게임은 참여 게이머 집단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무림, 혹은 강호의 세계를 재현하는 효과를 가지며 무협물의 계보로 위치 지어진다.


온라인 시대가 부른 강호의 새로운 바람


오락실이 저물면서 대전격투 게임의 대중적 인기는 사그라들었지만, 콘솔과 PC, 그리고 오락실에도 도입되기 시작한 네트워크 멀티플레이를 통해 대전격투 게임은 더욱 다양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무협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본격적인 ‘화산논검’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숫자는 줄었지만 그만큼 더 숙련도 측면에서 마니악 해진 대전격투 게이머들은 자신의 승패 기록을 통해 형성되는 랭킹 시스템 안에서 더욱 치열해진 순위 경쟁 환경을 맞았다. 무협물을 두고 벌어졌던 오랜 논란들, ‘곽정이 세냐 양과가 세냐’와 같은 논란은 이제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전의 결과로 정리되는 세상을 맞았다.


오프라인 잡지 시절에는 맨투맨으로나 전수되던 여러 초식들도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의 집대성을 통해 ‘무공비급’의 형태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요 기술과 콤보들, 운영과 파훼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늘 다른 플레이어의 난입이 열려 있었던 오락실과 달리 PC/콘솔에서는 연습 모드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기술과 초식을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활용하게 되었다. 대전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도장에서 고요하게 주요 초식을 연습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무협물의 주인공이 아침 안갯속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그 장면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5’의 파동권. 초기작부터 이어져 온 커맨드 기술 ‘파동권’은 초보자에겐 일정 수준의 연습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대전격투의 고수들은 유튜브나 트위치 등의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도장을 열기도 했다. ‘철권’의 손꼽히는 고수인 ‘무릎’ 배재민 선수의 유튜브는 자신의 대전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별도의 편집 영상으로 ‘철권’ 입문자를 위한 여러 기술과 노하우를 제공하면서 초보자들을 위한 입문 도장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관련 영상의 댓글에는 실제 기술 수행의 어려움을 묻기도 하고, 문하생들 간에 기술의 효용을 두고 간혹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볼거리가 적지 않다.


e스포츠의 영역에 들어오면 대전격투 게임의 양상은 드디어 ‘화산논검’ 그 자체가 된다. 다른 e스포츠도 마찬가지지만, 격투가들의 1:1 대결을 통한 토너먼트라는 대전격투 e스포츠 특유의 양상은 말 그대로 ‘천하제일 무술대회’의 장면을 만들어내며 이 장르가 명백히 무협물로부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e스포츠 명장면을 거론할 때 항상 1위로 꼽히는, 우메하라 다이고와 저스틴 웡의 그 유명한 대결에 환호했던 관중들이 본 것은 무협물의 로망이 가리키는 바로 그 지점에서의 희열이었다.


무협의 재미, 새로운 영역에서 꽃피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현재에도 계속 새롭게 발전해 나간다. 무협과 판타지의 콜라보도 있었고, 신무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전들도 적지 않은 성과를 드러내며 장르문학의 발전을 견인해 왔다. 대전격투게임이라는 디지털게임의 장르는 문학이나 영화와는 별도의 영역에서 무협의 핵심요소 중 하나인 대결과 승부라는 지점을 당사자의 시점으로 재발굴해낸 결과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게임매체에서의 무협 적용을 놓고 이야기할 때 무협 세계관을 베이스로 한 게임들을 꼽곤 하는데,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무협의 요소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장르라면 오히려 먼저 꼽아야 하는 것은 대전격투 게임이다. 승리를 위해 새로운 초식과 투로를 연습하고, 연습한 결과로 대결장에 서서 상대와 권과 권을 맞부딪히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주인공의 위치를 경험하는 대전격투 게임은 무협물이라는 오랜 대중문화콘텐츠를 새로운 기술 매체가 받아들여 소화해 낸 가장 의미 깊은 후예가 아닐 수 없다.


이경혁 평론가 /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과정. 디지털게임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글 쓰고 말하고 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등의 저서,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등의 방송과 기고 등을 통해 게임과 세상이 관계 맺는 방식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