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살인, 언맨드(Unmanned) - 게임 잡학 사전

2021-07-26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나 미니시리즈를 보면,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공포에 질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인물이 꼭 한 명씩 등장한다. 이런 인물은 전투 내내 참호나 엄폐물 뒤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교전이 끝나면 전우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의무대로 후송되곤 한다.

 

꼭 두려움 때문이 아니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에게 총을 발사하지 못한 미군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믿기 어렵겠지만 데이브 그로스먼의 저서 “살인의 심리학”에서 인용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에게 총을 발사한 미군 소총수의 비율은 15~20%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동료를 구출하고 탄약을 확보하는 등 용감하게 행동했지만, 적군을 향해 무기를 발사한 군인은 소수였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은 왜 발포를 거부했을까? 데이브 그로스먼은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살인자와 피살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확장시키며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켰다. 칼이나 도끼로 싸우던 시대에는 죽어가는 상대방의 얼굴과 잘려나가는 팔다리를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그러나 권총과 소총, 대포의 발명으로 살인자와 피살자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면서,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점차 줄어들었다.

 

비행기의 발명으로 폭격이 가능해지면서 거리는 한층 더 늘어났고, 폭격기 조종사는 땅 위에서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노암 촘스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학자였던 하워드 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항공대에서 폭격수로 복무했는데, 그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는 그가 폭격 작전을 수행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폭격한 고도-2만5천 내지 3만 피트-에서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없었고 비명도 들을 수 없었으며, 피도 보지 못했고 사지가 찢겨나간 광경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지상에 떨어지는 소이탄이 하나하나씩 마치 성냥처럼 불타오르던 장면뿐이다. 나는 그저 높은 하늘 위에서 내 일을 하고 있었다.”

 

하워드 진은 오랜 시간이 지나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들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폭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나마 폭격기에는 대공포나 요격기라는 위협이라도 존재했지만, 이제는 무인항공기까지 개발되어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도 안전하게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

 

몰레인더스트리아(Molleindustria)가 개발한 언맨드(Unmanned)는 기술의 발달이 살인을 얼마나 손쉬운 노동으로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게임이다.

 

주인공은 무인항공기 조종사로 폭격이라는 살벌한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의 일상은 회사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차를 몰고 출근하며, 쉬는 시간에 아내에게 전화해 아이의 안부를 묻고, 집에서는 아이와 비디오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든다. 가끔 악몽에 시달리고 잠들기 위해 양을 세어야 할 때도 있지만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은 딱 거기까지다. 게임은 살인이라는 비극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언젠가 과학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인공지능이 폭격 여부와 폭격 지점을 결정하는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더 이상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폭격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겠지만.

 

언맨드는 “Games for Change Award 2012”에서 “Best Gameplay”를 수상한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를 지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당신이 사전을 펼치는 수고만 각오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무료로 다운받아 플레이해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언맨드 개발사 홈페이지



이병찬 변호사 /

실력은 엉망이지만 오랫동안 게임을 사랑해 온 변호사입니다. 비디오 게임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2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