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TORY] 성과주의가 만든 괴물 이야기. 리걸 던전 - 게임 잡학 사전

2020-12-10


리걸 던전은 레츠놈(RETSNOM)과 레플리카(REPLICA)로 명성을 얻은 개인 개발자 SOMI의 작품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경찰대를 막 졸업하고 일선 경찰서에 배치된 신임 경위로, 게이머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서 등 수사기록을 검토하여 검찰에 송치할 의견서를 작성하게 된다.


만약 수사기록 곳곳에 흩어져있는 범죄의 단서들을 파악하여 법률과 판례에 맞게 의견서를 작성하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었다면, 리걸 던전은 경찰 업무를 가상으로 체험하는 퍼즐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걸 던전은 부하직원을 승진시키기 위해 경쟁자보다 더 탁월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 속에 게이머를 밀어 넣고, 수사기록 안에 기소와 불기소의 단서를 함께 배치하여 판단의 여지를 줌으로써 게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특별한 의미란 경찰이라는 관료조직이 성과주의의 틀에 갇혔을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관료조직에서는 민간처럼 유연한 방식으로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다. 파격적인 인사나 고액의 인센티브 지급은 불가능하며, 승진과 보직이라는 두 가지 당근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구성원들이 선호하는 보직도 결국은 승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발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관료조직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결국 승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많은 권한과 더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승진은 구성원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조직은 구성원이 납득할만한 객관적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기 위해 정량적 평가라는 이름으로 모든 실적은 수치화된다. 게임 도중 수시로 나오는 “선행미담 0.5점, 절도 2점, 살인 15점”이라는 표어는 경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정량적 평가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평가 시스템에 길들여지는 순간, 각각의 구성원은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며, 조직의 본래 목적은 자취를 감춘다는 점이다. 경찰법 제3조에서는 “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의 보호”를 국가경찰의 최우선 임무로 규정하고 있지만, 자신과 부하직원의 진급을 위해서라면 경찰의 본래 임무는 쉽게 무시된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평가 시스템이 오히려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문제는 비단 경찰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충청남도에 위치한 홍승의료원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의사들에게 성과연봉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의 성과를 환자가 지급한 병원비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의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였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의사들은 성과를 높이기 위해 필요 없는 검사를 실시했고,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보기 위해 충분한 진료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본래의 목적이 성과주의에 압도당한 것이다.


리걸 던전은 성과주의에 내던져진 개인이 어떻게 괴물로 변하게 되는지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과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SOMI의 문제 제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찬 변호사 /

실력은 엉망이지만 오랫동안 게임을 사랑해 온 변호사입니다. 비디오 게임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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