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공간의 테크노 커먼스 - 아트게이밍을 향한 기술적 지평들 (2)

2020-10-28


새로운 미디어·기술적 발명에는 언제나 새로운 수용적 층위의 지각이 뒤따른다. 영국인 사진가인 1882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24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움직이는 말>을 촬영했을 때, 말의 네 다리가 공중에 떠있는 순간은 언제나 이완의 순간이 아니라 수축의 순간임을 사람들은 처음 알게 됐다. 마이브리지의 사진은 과학 학술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카(Scientific America)에 실렸는데, 과학자들에게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지각, 오로지 기계 장치를 통해서만 관찰할 수 있는 기술적 지각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마이브리지가 촬영한 <경주마>(1882)와 마레가 촬영한 <비행하는 펠리컨>(1882).


새로운 지각을 발견한다는 것은 언제나 엉뚱한 동기가 뒤따름을 의미한다. 마이브리지의 동기는 단순히 ‘말이 도약하는 순간 네 발이 공중에 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의 사진을 유심히 지켜본 프랑스의 과학자 에띠엔 쥘 마레(Marey)는 여기에 더욱 엉뚱한 발상을 덧붙였다. 그는 리볼버 권총의 회전식 약실과 소총의 격발을 카메라에 접목해 연속으로 사진을 찍는 동체사진촬영술(Chronophotography)을 고안해 냈다. 마레는 정지된 시간이 아닌 움직임 그 자체를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 싶어 했고, 1초에 12장을 촬영하는 건 셔터로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500분의 1초라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되고, 고속촬영을 통해 알지 못하던 물리적 공간을 관찰할 수 있게 되자,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해석 방식은 완전히 변했다. 원근법으로 재구성된 완벽한 기하학의 세계, 황금비율과 인과율로 짜여진 뉴턴적 공간이 실재가 아니라 감각의 감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 허구의 세계를 깨부수기 위해 새롭게 발견된 지각을 하나의 병참술로 재발명했다. 이들에게 전위부대라는 뜻의 ‘아방가르드’ 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잔을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원근법으로 조직화된 대상성의 공간을 깨뜨리기 위해 위태로운 운동 상태를 재현하고자 했으며, 마이브리지와 마레의 작업을 유심히 흥미롭게 관찰했던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를 전시하며 “자연주의의 노예적 쇠사슬을 영구히 단절했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시지각의 기술적 발견과 재현양식의 간-매체적 연쇄. 마이브리지의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1887) (상),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 (우 하),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 (우), 밀리 굥이 스트로보스코프 기법으로 촬영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42) (좌)


그로부터 얼마 뒤, 입체파의 기수인 카를 브라크와 피카소 등은 재현의 영역에서 고전물리학의 대상성을 급진적으로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시각적 재현에 있어 분산된 시각과 다각적인 관점이 제시된다는 것은 유럽 중심적 세계, 이성 중심적 사고가 해체되고 다양한 계급, 문화, 인종, 성별이 공존하는 관점주의적 세계가 도래함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동체사진촬영술의 아이디어를 시네마토스코프(Cinématographe)로 확장한 뤼미에르 형제는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을 촬영해 스크린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혼비백산 도망치게 만들었으며, 조르주 멜리에스는 여기에 마술을 접목해(사실은 필름을 겹치거나 잘라 붙이는 편집술에 다름 아닌) 사람이 연기로 사라지는 마술을 화면에 구현했다. 소비에트 몽타주의 시대를 연 에이젠슈타인은 영화의 몽타주로 생성한 시지각의 리듬을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 운율”로 해석했으며, 해체된 대상성의 공간에 불연속적 시간의 흐름들을 부여했다. 역사철학자인 벤야민이 평가했듯이, 영화가 보여주는 충격효과로 인해 대중 전체가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가 되어 실재를 읽어낼 수 있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가 열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적 이행의 중심에 ‘아우라의 붕괴’가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기술장치의 발명과 그로 인한 예술 재현 양식 및 내용의 변화는 단순히 아우라가 붕괴된 틈바구니에 피어난 꽃이 아니었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의 붕괴가 일으킨 공시적 시공간의 변화, 즉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해방의 기술’을 능숙히 다루게 된 인간의 유희공간(spielraum) 확대야말로 그 본원이 된다. 현대 대중문화와 문화산업, 그리고 자본주의 운동은 무엇보다 이 확대된 유희공간을 어떻게 상품 생산의 공간으로 점유하느냐에 대한 역사적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마술사이자 영화편집술의 창시자인 멜리에스는 영화적 시각적 효과를 다각화화하기 위해 <고무머리 남자>(1901) (좌) 에서 바닥에 레일을 깔고 카트에 담긴 카메라를 움직이며 촬영하는 등 특수효과의 토대들을 처음 사용했다. 반면 소비에트 몽타주의 기수 베르토프 감독은 인간의 눈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카메라의 시지각’인 키노아이(Kino-eye)의 시점을 창안해냈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 (우)는 인간의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 키노아이의 시점에서 응시한 세계의 풍경화이다. 베르토프는 “이 영화는 세계에 대한 코뮌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했다.


기계식 게임에서 전자 게임으로, 그리고 디지털 게임에 이르기까지 게이밍의 발전사는 이러한 유희공간의 확대와 수축을 조절하는 ‘문화 생산’의 자본주의적 전유와 노동의 반대편에서 인간 놀이가 자유를 생산하고자 하는 탈주가 충돌하는,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의 태동기에 최초로 발명된 전자 게임인 <테니스 포 투>(1958)와 <스페이스 워!>(1961)는 각각 오실로스코프와 미 국방성 PDP-1 컴퓨터를 역설계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마이브리지와 마레의 엉뚱한 탐구정신이 새로운 지각 경험을 발굴한 것처럼, 이들은 군사 목적의 기술장치를 해킹해 프랑켄슈타인 과학의 선로로부터 정보기술로 매개된 놀이를 새롭게 발견했다. 사진과 영화가 예술의 성격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면, 이 기술해킹은 놀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인류학자인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하나의 문화라기보다는 문화 이전에 원형(prototype)으로 존재하는 형식, 즉 문화를 생성하는 원천이다.


사실, <테니스 포 투>와 <스페이스 워!>의 진정한 혁신은 사이버네틱스의 시대에 놀이의 감각과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기술적 조건들을 조건 없이 공유하는 커먼스(commons)를 창출한 데에 있다. 숱한 발명품을 특허로 등록한 발명가이자 핵물리학자이기도 했던 윌리엄 히긴보덤은 <테니스 포 투>만은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놀이는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특허로 등록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MIT 공대생이었던 스티브 러셀은 <스페이스 워!>의 작동 원리와 코드를 원하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공개했으며, 냉전시기 미군의 방공 프로그램 프로젝트에서 일하면서도 반전 평화주의의 신념을 등지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


<스페이스 워!>(1962)를 플레이하는 스티브 러셀. 그는 <스페이스 워!>를 자유 소프트웨어이자 오픈 소스로 남겨두었고, 이는 게이밍이 사이버펑크 시대의 놀이문화로 연착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자놀이가 자아낸 커먼스의 이념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 정보기술 환경에서의 공유문화의 근간이 되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는 컴퓨터 코드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복제되고, 공유된다. 포탈과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에서, 블로그나 카페의 포스팅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우리는 원하는 대부분의 정보들을 얻고 공유할 수 있는데 이는 ‘조건 없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정보 공유’라는 공통규약 없이는 불가능했다. 왜 우리는 누군가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만들고, 누가 만든 것들을 복제하고, 그것들을 열심히 퍼다 나르는가? 전자 게임이 열어젖힌 새로운 유희공간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이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로만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감각들로 이뤄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장이나 교환가치가 아닌 선물, 증여, 공유, 그리고 탈중심화된 민주적 연대가 놀이의 본질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인류 공동체의 참된 진보는 경쟁을 위한 경쟁이 아닌 경쟁에서 촉발된 협력으로 이뤄진다.


당연하게도, 시장과 자본의 논리는 이러한 커먼스를 제한하고 가치 축적이라는 자장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83년의 아타리 쇼크에서 1999년의 닷컴 붕괴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로 연결된 지구 시장의 흐름들은 언제나 커먼스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스를 수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강력한 저작권 경제와 대량 생산-유통의 시장주의적 제작시스템이 기술적 예술가들의 아마추어리즘을 패퇴시켰다. 디지털 게임이 지구 제1의 문화산업이 되기까지 반세기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더니즘 예술의 감각으로 게이밍의 사회적 가치를 설정하고자 하는 관점은 잔여하고 있다. 게이밍이 예술이다 아니다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게임의 반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게이밍이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공유의 감각에 대해서는 여전히 탐색되지 못하고 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커먼스’의 구성체들. 공유, 연결, 평등, 자유, 협력의 테크노 커먼스는 게이밍이 자아낸 새로운 인간 공동체적 감각이며, 미래 게이밍이 도달해야 하는 시대정신이다.


자유 소프트웨어, 카피레프트, 오픈소스와 오픈 하드웨어 등 일련의 운동들은 ‘자유롭고 수평적인 공유를 기반으로 한 진보’라는 규제적 이념을 향하고 있으며, 미래의 아트게이밍을 향한 프로그램은 이러한 원천을 탐구해야 하는 특이점에 다다랐다. 프로세서의 발전과 정비례한 그래픽 및 드라마의 발전은 그 과정의 부산물이지 목적이 아니며, 그것으로 미적 양식이 규정되지도 않는다. 미래 아트게이밍의 제 1 목적은 게이밍의 기술적 조건과 실재들을 어떻게 더 멀리 공유하고 실천하는가에 도사린다.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장난감 자동차의 바퀴를 굴리고 인형들로 역할극을 창안해내는 것처럼, 게이밍의 유희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제작자이자 향유자로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게이밍의 기술적 요소들의 민주적 접근을 구현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예술적인 게임’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들을 창출해내기 위해서는 배타적 소유보다 공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오픈소스 및 오픈 하드웨어등의 공유 요소들이 자유 게이밍의 주 기관으로 기능할 때 성취될 수 있다. 요컨대 미래 테크노 커먼스의 진정한 미적 숭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뇌하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완전히 개방된 소스와 하드웨어를 가지고 자유롭게 뭔가를 만들 수 있는 디지털 유희공간의 산책자들이 요청된다.


험블 인디 번들(상)은 리눅스용 게임을 모아 번들로 판매하는 험블 번들사의 새로운 도전정신이 깃든 게이밍 포맷이다. 기존의 AAA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리눅스 기반 게임들을 자신이 원하는 가격만큼 지불하고 플레이할 수 있으며, 게임 구매 비용을 자신이 원하는 비영리단체에 사용하게끔 설정할 수도 있다. 오픈 하드웨어 게이밍 (하) (출처: http://vilaca.eu/handheld-arduino-color-console/)은 기술해킹에 익숙한 서구의 DIY 메이커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산업중심주의적 생산과 유통에서 탈주하는, 그러면서도 게이밍의 본래 커먼스 정신에 충실한 대안적 게이밍의 지평이 탐색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리눅스, 아두이노,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훌륭한 커먼스 기반 운영체계 및 하드웨어 인프라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활용한 제작과 플레이도 활발히 탐색되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오늘날 게이밍 테크놀로지의 근간 기술인 VR과 키넥트 센서, 아두이노 프로세서를 이용하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커먼스의 이념으로 짜여진 디지털 유희공간은 사회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에서 중요한 문제는 가치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는가에 불과하다. 게이밍을 단순히 상품으로 생각하고 시장적 가치만을 추구한다면, 올해에도 내년에도 거의 변화 없는 스포츠 게임의 신버전을 구매하거나 새로운 아이템의 강화확률을 계산하며 지갑을 만지작거릴 일들만 기다린다. 그러나 유희공간의 커먼스는 이것들을 넘어설 때에 비로소 현상될 수 있는 사회적 변화이다. 코드의 개방된 접근권, 공유의 확대, 그리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역설계적 상상력은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놀이의 진정한 지평은 자유에서 자율로 나아갈 때, 놀이의 참가자가 스스로 입법자가 될 때 펼쳐진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곧 어릴 때 놀이에 열중하던 진지함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신현우 디지털 문화연구 /

정보·기술 문화연구자로, 테크노 게이밍 문화와 디지털 환경에서의 노동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사물에 수작부리기』(공저) 등이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