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을 즐기는 행위를 일컫는 여러 표현들이 있다. 게임을 하다, 수용하다, 이용하다, 플레이하다 등이 대표적이다. 특정 표현이 맞거나 틀림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게임에 대한 관점이 윤리적·규범적 관점, 경제적·기술적 관점, 문화적 관점 등 여러 가지인 것처럼, 게임을 즐기는 행위에 대한 관점 또한 수렴되지 않을 수 있다. 하기, 수용하기, 이용하기, 플레이하기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겠다. 게임하는 행위가 단순히 게임 속 알고리즘을 수용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수용하다’는 적합하지 않다. ‘이용하다’는 게임을 도구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데다, 수용하다와 마찬가지로 게임 외 다른 미디어에도 두루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게임하다’, ‘플레이하다’는 둘 다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다만, ‘플레이하다’는 일차적으로는 ‘놀(이하)다’는 뜻으로, 디지털 게임만이 아닌 게임과 놀이 전반을 대상으로 삼는다. 적극적 참여행위의 대상을 게임에 한정했을 때 ‘게임하다’가 된다.
이후의 글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왜 ‘게임하다’가 아니라 ‘플레이하다’인가? 일차적으로는 게임하는 행위를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보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게임과 놀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게임과 놀이가 밀접하게 연관되기는 하나, ‘게임=놀이’는 아니다. 놀이가 곧 게임인 것도 아니며, 게임 또한 전통적 놀이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둘의 유사점이나 차이점에 주목하는 연구는 다양하며, 그 견해 역시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게임이 놀이의 부분집합이라 보는 견해(예를 들어 Frasca, 1999)도 있지만, 놀이를 포섭한 게임이 기존 놀이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견해(예를 들어 Juul, 2005/2014; Loftus & Loftus, 1983; Salen & Zimmerman, 2003/2010 등)도 있다. 하지만 놀이와 게임의 관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상위 혹은 하위범주에 속하는 문제로 축소해 논의할 것이 아니다. 게임을 놀이의 한 부분 혹은 그 반대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별개의 차원에 있는, 하지만 중첩되거나 상호연관되는 범주로 파악하고 논의하는 것이 게임의 복잡다단한 특성을 포착하는 데 보다 유익한 일처럼 보인다(박근서, 2009).

그렇다면 왜 게임을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봐야 하는가? 이후의 글들이 단순히 특정 장소에서 플레이어들이 모니터 앞에 낮아 물리적 인터페이스(게임 외적 요소로, 조이스틱, 키보드, 마우스 등을 포함)를 조작하는 행위 수준을 넘어, 게임 플레이 경험이 확장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확장된 플레이는 전통적 의미의 게임하기로는 포괄하지 어려운 것들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도 그것들은 게임을 ‘갖고 노는’ 일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확장된 게임 플레이를 더욱 더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물론 게임 플레이 경험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게임하기 자체에 대해 깊이 있게 들어가는 성격을 갖지는 않는다. 게임을 둘러싼 (게임하기가 아닌) 행위들, 그리고 게임과 관련 맺기는 하나 결국은 게임 자체는 아닌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 까닭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게임과 관련되고, 게임을 ‘갖고 노는’ 일로서 게임 플레이 경험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게임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함을 말하려 한다.
게임 플레이 경험의 확장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지점들은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 보기’이다. 사실 게임을 ‘보는’ 행위는 언제나 ‘하기’와 함께해왔다. 화면 속 게임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은 플레이어뿐 아니라, 화면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대상(이경혁, 2016)이기 때문이다. 게임하기의 과정에서 함께 이뤄지던 보기를 독립된 하나의 경험으로 부각시킨 것은 e스포츠다. 게임을 소재로 한 인터넷 개인방송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 보기가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비(非)플레이어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e스포츠나 인터넷 게임방송 팬 중에는 비플레이어임에도 지속적으로 경기/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 현장의 조명과 음향, 중계 카메라의 구도와 시점 등은 관람객/시청자를 거의 직접 게임을 하는 수준으로까지 몰입시킨다. 덕분에 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프로게이머나 크리에이터의 플레이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특정 게임을 보는 행위는 (플레이어든 비플레이어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게 만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어떻게든 게임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데 영향을 미친다(강신규·원용진·채다희, 2019).
둘째, ‘게임화(gamification)’다. 게임화란, 게임(에 내재한 여러 요소들)을 사회와 일상생활 전반, 그리고 특정 문화장르나 표현영역에 활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게임화는 게임 논리가 여타의 제도, 인간 해위와 실천, 몸과 인식 속에서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 핵심은 게임 아닌 것을 새로우면서 혼성적인 무언가로 만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다. 게임화 이전 우리가 게임을 ‘가지고(with)’ 살았다면, 게임화를 통해 우리는 게임 ‘안에(in)’ 산다. 게임화는 게임을 가지고 살던 시대에서 게임 안에 사는 시대로 바뀌는 과정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러한 게임화의 확산은 게임이 우리 삶을 규정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틀 혹은 방식이 됨을 나타낸다. 우리 일상에 게임이 관여하고, 게임에 따라 일상이 재편되기도 하며, 게임이 연결하는 거대한 세계가 우리 주변에 형성되는 것이다(강신규, 2018).
셋째, ‘놀(이노)동(playbor)’이다. 놀동은 놀이(play)와 노동(labor)의 조합어로, 퀴클리흐(Kücklich, 2005. 1)가 게임하는 사람들이 제작사에 고용돼 있지는 않지만, 게임산업의 상업적인 가시성과 지속성을 확대하는 자유노동(free labor)을 제공하고 있음을 잡아내며 만든 개념이다. 가령, 다중사용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MORPG)의 능숙한 플레이어가 초보 플레이어에게 게임 속 시스템을 이해시키고 그들의 모험을 돕는 일은, 게임 플레이의 일부가 아닌 제작사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놀동(Dyer-Witheford & de Peuter, 2009/2015)이다. 이와 유사하게 테라노바(Terranova, 2000)는 특히 팬들이 생산한 콘텐츠에 의존하는 디지털 기반 문화산업 내에서 자유노동이 빈번하게 발견됨을 지적한다. 퀴클리흐의 놀동 개념 또한 ‘지속적이고 자발적이며 임금이 지불되지 않고 즐겨지지만 착취되는 것’이라는 테라노바의 자유노동에 대한 정의와 닿아있다. 다만 자유노동 개념이 노동주체가 고용돼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놀동은 노동이 갖는 ‘놀이적’ 성격을 부각한다. 따라서 놀동을 들여다보는 일은, 놀이의 노동화 혹은 노동의 놀이화를 게임과의 관련 속에서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셋은 각기 다른 양상처럼 보이지만, 모두 기존의 게임/플레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거나 확장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게임은 미디어이자 콘텐츠이며, 동시에 텍스트로서 게임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게임 플레이란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수행(performance) 혹은 실천(practices)과 관련된다(박근서, 2009). 하지만 새로운 문화적 수행 혹은 실천과 함께 게임을 갖고 노는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과정에 주목해 게임이 특정 문화장르나 표현영역, 우리 일상생활 전반, 그리고 사회와 맺는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앞으로의 글들이 지향하는 바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게임 플레이 경험을 다시 고찰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강신규 연구위원 /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미디어광고연구소 연구위원. 방송, 게임,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겸임교수, 문화체육관광부 게임문화포럼 위원,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GSOK)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공저, 2019),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포비아>(공저, 2013), 논문으로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메타/게임으로서의 ’게임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공저, 2019) 등이 있다.
게임을 즐기는 행위를 일컫는 여러 표현들이 있다. 게임을 하다, 수용하다, 이용하다, 플레이하다 등이 대표적이다. 특정 표현이 맞거나 틀림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게임에 대한 관점이 윤리적·규범적 관점, 경제적·기술적 관점, 문화적 관점 등 여러 가지인 것처럼, 게임을 즐기는 행위에 대한 관점 또한 수렴되지 않을 수 있다. 하기, 수용하기, 이용하기, 플레이하기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겠다. 게임하는 행위가 단순히 게임 속 알고리즘을 수용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수용하다’는 적합하지 않다. ‘이용하다’는 게임을 도구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데다, 수용하다와 마찬가지로 게임 외 다른 미디어에도 두루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게임하다’, ‘플레이하다’는 둘 다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다만, ‘플레이하다’는 일차적으로는 ‘놀(이하)다’는 뜻으로, 디지털 게임만이 아닌 게임과 놀이 전반을 대상으로 삼는다. 적극적 참여행위의 대상을 게임에 한정했을 때 ‘게임하다’가 된다.
이후의 글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왜 ‘게임하다’가 아니라 ‘플레이하다’인가? 일차적으로는 게임하는 행위를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보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게임과 놀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게임과 놀이가 밀접하게 연관되기는 하나, ‘게임=놀이’는 아니다. 놀이가 곧 게임인 것도 아니며, 게임 또한 전통적 놀이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둘의 유사점이나 차이점에 주목하는 연구는 다양하며, 그 견해 역시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게임이 놀이의 부분집합이라 보는 견해(예를 들어 Frasca, 1999)도 있지만, 놀이를 포섭한 게임이 기존 놀이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견해(예를 들어 Juul, 2005/2014; Loftus & Loftus, 1983; Salen & Zimmerman, 2003/2010 등)도 있다. 하지만 놀이와 게임의 관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상위 혹은 하위범주에 속하는 문제로 축소해 논의할 것이 아니다. 게임을 놀이의 한 부분 혹은 그 반대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별개의 차원에 있는, 하지만 중첩되거나 상호연관되는 범주로 파악하고 논의하는 것이 게임의 복잡다단한 특성을 포착하는 데 보다 유익한 일처럼 보인다(박근서, 2009).
그렇다면 왜 게임을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봐야 하는가? 이후의 글들이 단순히 특정 장소에서 플레이어들이 모니터 앞에 낮아 물리적 인터페이스(게임 외적 요소로, 조이스틱, 키보드, 마우스 등을 포함)를 조작하는 행위 수준을 넘어, 게임 플레이 경험이 확장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확장된 플레이는 전통적 의미의 게임하기로는 포괄하지 어려운 것들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도 그것들은 게임을 ‘갖고 노는’ 일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확장된 게임 플레이를 더욱 더 놀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물론 게임 플레이 경험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게임하기 자체에 대해 깊이 있게 들어가는 성격을 갖지는 않는다. 게임을 둘러싼 (게임하기가 아닌) 행위들, 그리고 게임과 관련 맺기는 하나 결국은 게임 자체는 아닌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 까닭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게임과 관련되고, 게임을 ‘갖고 노는’ 일로서 게임 플레이 경험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게임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함을 말하려 한다.
게임 플레이 경험의 확장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지점들은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 보기’이다. 사실 게임을 ‘보는’ 행위는 언제나 ‘하기’와 함께해왔다. 화면 속 게임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은 플레이어뿐 아니라, 화면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대상(이경혁, 2016)이기 때문이다. 게임하기의 과정에서 함께 이뤄지던 보기를 독립된 하나의 경험으로 부각시킨 것은 e스포츠다. 게임을 소재로 한 인터넷 개인방송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 보기가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비(非)플레이어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e스포츠나 인터넷 게임방송 팬 중에는 비플레이어임에도 지속적으로 경기/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 현장의 조명과 음향, 중계 카메라의 구도와 시점 등은 관람객/시청자를 거의 직접 게임을 하는 수준으로까지 몰입시킨다. 덕분에 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프로게이머나 크리에이터의 플레이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특정 게임을 보는 행위는 (플레이어든 비플레이어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게 만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어떻게든 게임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데 영향을 미친다(강신규·원용진·채다희, 2019).
둘째, ‘게임화(gamification)’다. 게임화란, 게임(에 내재한 여러 요소들)을 사회와 일상생활 전반, 그리고 특정 문화장르나 표현영역에 활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게임화는 게임 논리가 여타의 제도, 인간 해위와 실천, 몸과 인식 속에서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 핵심은 게임 아닌 것을 새로우면서 혼성적인 무언가로 만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다. 게임화 이전 우리가 게임을 ‘가지고(with)’ 살았다면, 게임화를 통해 우리는 게임 ‘안에(in)’ 산다. 게임화는 게임을 가지고 살던 시대에서 게임 안에 사는 시대로 바뀌는 과정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러한 게임화의 확산은 게임이 우리 삶을 규정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틀 혹은 방식이 됨을 나타낸다. 우리 일상에 게임이 관여하고, 게임에 따라 일상이 재편되기도 하며, 게임이 연결하는 거대한 세계가 우리 주변에 형성되는 것이다(강신규, 2018).
셋째, ‘놀(이노)동(playbor)’이다. 놀동은 놀이(play)와 노동(labor)의 조합어로, 퀴클리흐(Kücklich, 2005. 1)가 게임하는 사람들이 제작사에 고용돼 있지는 않지만, 게임산업의 상업적인 가시성과 지속성을 확대하는 자유노동(free labor)을 제공하고 있음을 잡아내며 만든 개념이다. 가령, 다중사용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MORPG)의 능숙한 플레이어가 초보 플레이어에게 게임 속 시스템을 이해시키고 그들의 모험을 돕는 일은, 게임 플레이의 일부가 아닌 제작사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놀동(Dyer-Witheford & de Peuter, 2009/2015)이다. 이와 유사하게 테라노바(Terranova, 2000)는 특히 팬들이 생산한 콘텐츠에 의존하는 디지털 기반 문화산업 내에서 자유노동이 빈번하게 발견됨을 지적한다. 퀴클리흐의 놀동 개념 또한 ‘지속적이고 자발적이며 임금이 지불되지 않고 즐겨지지만 착취되는 것’이라는 테라노바의 자유노동에 대한 정의와 닿아있다. 다만 자유노동 개념이 노동주체가 고용돼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놀동은 노동이 갖는 ‘놀이적’ 성격을 부각한다. 따라서 놀동을 들여다보는 일은, 놀이의 노동화 혹은 노동의 놀이화를 게임과의 관련 속에서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셋은 각기 다른 양상처럼 보이지만, 모두 기존의 게임/플레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거나 확장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게임은 미디어이자 콘텐츠이며, 동시에 텍스트로서 게임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게임 플레이란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수행(performance) 혹은 실천(practices)과 관련된다(박근서, 2009). 하지만 새로운 문화적 수행 혹은 실천과 함께 게임을 갖고 노는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과정에 주목해 게임이 특정 문화장르나 표현영역, 우리 일상생활 전반, 그리고 사회와 맺는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앞으로의 글들이 지향하는 바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게임 플레이 경험을 다시 고찰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강신규 연구위원 /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미디어광고연구소 연구위원. 방송, 게임,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겸임교수, 문화체육관광부 게임문화포럼 위원,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GSOK)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공저, 2019),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포비아>(공저, 2013), 논문으로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메타/게임으로서의 ’게임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공저,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