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고딕 신디사이저 - 아트 게이밍을 향한 기술적 지평들

2020-09-09


  독일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가 평범한 소시민들의 초상을 담은 사진집 <우리 시대의 얼굴들>을 발간한 1920년대, 이를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평가들이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내재한 노동계급의 비참성과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를 <블레이드 러너> 나 <공각기동대> 등으로 연속되는 역사적 뿌리라고 인식하기까지는 장구한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과 광고,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의 언설로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보내는 오늘날에는 객석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것마저도 오페라나 발레처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진과 영화가 고풍스런 취미나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을 그 누구도 기억 못하듯,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적 발명품이 미디어와 결부되어 있는 경우 그 낯설은 독해 방식과 문법에 익숙해지기 까지 이행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리터러시에 관한 것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우리 시대의 얼굴들>(1929) 과 로버트 카파의 <전쟁 고아와 미군 병사>(1943) (상단).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6) (하단)


  디지털 게임 또한 이러한 사회적 리터러시의 이행기에서 가장 문제적인 기술적 발명품 중 하나일 것이다. 빌 게이츠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640킬로바이트의 메모리 이상이 필요 없다고 공언했을 때, 컴퓨터는 여전히 복잡한 계산기 이상의 존재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기술적 발명에는 역설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존에 인류가 향유해 왔던 기술적 존재 양식을 뒤흔들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현상학적 통로들을 배치한다. 진보와 퇴행, 노스탤지어와 낙관주의가 무수히 협상하고 뒤엉키는 시행착오 가운데서 새로운 미적 숭고에 대한 공통 감각이 등장하는 것이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수많은 화가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사진을 도입했다. 사진과 예술이 만나는 과도기로서 ‘픽토리얼리즘’ 회화를 거쳐 매그넘의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진화하기까지의 작은 역사는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제이다. 여전히 일상의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강했던 뤼미에르 형제 이후, 영화 또한 연극의 연출과 미장센을 필름에 담는 과정을 거친 후 긴 상업화의 터널 끝에서야 까이에 뒤 시네마라는 작가주의의 사회 감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디지털 게임 또한 비슷한 경로로 진화해 왔다. 최초의 게임 <테니스 포 투> 와 <스페이스 워!>에서 <퐁>, <슈퍼마리오> 등의 상업화를 거쳐 실사와 다를 바 없는 오늘날의 게임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게임은 이전에 영화와 사진, 회화, 놀이, 음악 등에서 행해졌던 실험들을 기술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온 총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고도의 컴퓨터 기술을 토대로 하는 디지털 게이밍이야 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테크네(Techne)라고 불렀던 예술-기술의 변증법을 가장 구체화한 존재양식이다.


최초의 전자 게임 <테니스 포 투>(1958), <퐁>(1972), <슈퍼마리오>(1981),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2018)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게임을 예술로 부를 것인가, 일시적인 여흥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떠나 먼저 전제되어야 할 점은 게이밍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의 편재성으로 인해 오늘날 예술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사진과 카메라, 영화와 영사기와 달리 게임을 출력하고 플레이하는 물리적 실체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이며, 컴퓨터는 복잡한 코드와 신호가 역학을 이루는 기술적 구성물이다. 작동의 본원이 컴퓨터라는 점에서는 한편으로 수학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디지털 게이밍에 들어선 플레이어는 무엇보다 보고, 듣고, 움직이며 한편으로 ‘조작’한다. 조작을 거쳐 작동이 수행되어야 비로소 입출력이 이뤄지며, 이 프로세스가 순환하면서 게이밍은 수학의 세계에서 ‘동역학’ 이라 부르는 에르고딕(Ergodic)으로 전화하게 된다.


  디지털이 아닌 게임이라고 해도 엄밀한 수학적 규칙이 적용된 게임에서 에르고딕의 논리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주사위놀이의 경우, 매 번 특정한 숫자가 나올 확률은 1/6이지만 주사위를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그 평균값은 3에 수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위를 던지는 매 순간은 플레이어를 흥분케 한다. 이미 결정된 수학적 결정구조를 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를 유희하는 것이다. 디지털 게임의 연산은 매 순간이 이러한 에르고딕의 연속인데, 이 과정을 통해 플레이어는 주어진 유희 공간을 탐색하게 된다.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대상과 상호작용하며, 정해진 룰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그것이 사실은 기계적 작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변주하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프로세스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게이밍의 본질이 된다. 이는 영화의 본질이 내러티브가 아니라 몽타주인 것과 유사하다. 예컨대 <셜록 홈즈>의 똑같은 내러티브를 진행한다 해도 영화로 보는 것과 디지털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할 수 있다. 물리적 체계가 컴퓨터이기 때문에, 그리고 규칙으로 주어지는 매커닉이 수학적으로 이뤄진 것 때문에 게이밍의 테크네에 있어 ‘에르고딕’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가 가장 주된 미학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트 게이밍, 즉 예술을 향하는 게이밍의 에르고딕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영화의 매체적 본질이 된 몽타주를 창안해낸 소비에트의 영화감독들은 단순히 스킬이나 기술적 조작을 통해서 그것에 접근하지 않았다. 영화가 사람들을 더 나은 세계로 영도할 것이라는 낙관주의, 인간 노동과 민주적 변혁을 위한 예술의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 그리고 모순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차가운 시선을 통해서야 ‘세계에 대한 시각의 혁명적 해석’이 가능할 수 있었다. 아트 게이밍에서도 마찬가지다. 변화된 정보·기술 환경이 우리의 물적·시각적 공간을 완전히 재편했다면, 그에 걸맞는 새로운 유희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주어진 공간을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 지각 능력, 인간의 유희를 미적인 방식으로 해방시키는 ‘에르고딕’에 관한 도전이야말로 몽타주에서 시네마로 이행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요컨대 디지털 게임은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소마 같은 마약이라거나 너드들이 즐기는 서브컬쳐라는 자기 인식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술이 진보하면 흔히 등장하는 뉴미디어론, 혹은 스토리텔링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낡은 시각과 결별해야만 한다. 엄밀히 말해 디지털 게임은 그 자체로서는 예술이 아니다. 연산적 알고리즘과 입출력으로 작동하며, 수행성보다는 실행성이 선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적 조건 때문에 디지털 게임은 ‘예술적인 것들을 출력할 수 있는’ 기계에 더 가깝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예술이라고 부르지만 바이올린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디지털 게임은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아닌 신디사이저(Synthesiser)와 거의 유사할 것이다. 진공관의 탄생으로 만들어진 기계인 점, 처음엔 하드웨어서 출발해 소프트웨어로까지 발전한 점까지 디지털 게임과 신디사이저는 존재론적 본질이 거의 합치된다. 신디사이저를 통해 플레이어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악기의 소리를 전자적으로 흉내내거나 조합할 수 있고, 나아가 물리적인 환경에 존재하지 않았던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신디사이저를 통해 음악 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으며, ‘청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이 탄생했다. 우리가 잘 아는 백남준의 작업인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전자화된 세계에서 시각과 청각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더할 급속도로 진보하고 있는 디지털 게이밍은 미술과 음악, 서사와 건축, 놀이와 스포츠가 신디사이저의 리믹스된 정보기술 환경으로 도약하고 있다. 아트 게이밍을 향한 시론에 발을 내딛기 위해,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존재양식에 대한 고찰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에르고딕 신디사이저’ 라는 개념에서 출발할 당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기계는 ‘플레이’를 출력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의 플랫폼 연합 경제를 형성하고 대량의 플레이노동을 자아내고 있기도 하다.


백남준의 대표적인 작업인 <비디오 신디사이저>. 신디사이저와 비디오의 입출력 기능을 결합, 기술적으로 리믹스된 영상 및 장치를 동시에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문명의 새벽에서 처음 나타났던 테크네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비가역적인 예술의 흐름에서 우리는 게이밍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이는 기술-예술과의 관계를 성찰하기 이전의 또 다른 문제인 놀이-예술과의 커플링을 다시 질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노동의 시간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긴다는 것, 그중에서도 놀이를 한다는 것은 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광섬유와 반도체가 성운과 별자리만큼이나 복잡하게 시공간을 가득 메운 시대이지만, 놀이의 본질은 화톳불을 돌며 원무를 추던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가치를 생산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즐겨야 하는 존재이고, 놀이는 공통감각과 유대감, 형제애 속에서 크기가 더 커지며, 인간은 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디지털 게이밍의 새로운 기술적 지평, ‘에르고딕 신디사이저’는 예술과 기술이 격자구조로 얽혀져 펼쳐진 투망에 인간 유희의 색채들을 어떻게 덧입힐지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가들과 그리고 컴퓨터 공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계놀이를 출력하는 악보를 함께 작곡해야 하는 이유이다.


신현우 디지털 문화연구 /

정보·기술 문화연구자로, 테크노 게이밍 문화와 디지털 환경에서의 노동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사물에 수작부리기』(공저) 등이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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